우리들의 기부이야기
[2020필란트로피 '나의 기부이야기'] 내 의사가운 깃 한켠에 자리잡은 빨간 강낭콩
2020-12-28

작성자박*솔

내 의사 가운 깃 한켠에는 빨간 강낭콩 모양의 작은 뱃지가 항상 자리잡고 있다.
물건을 잘 잃어 버리는 편이지만 이 뱃지만큼은 가운을 바꿔 입을 때마다 가장 먼저 옮겨 달면서 4년째 함께 하는 중이다.
흰 가운에 빨간색 뱃지가 아무래도 눈에 띄는 탓에 어디서 난 거냐고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 때마다 웃으며 대답한다.
"조혈모 세포 기증을 하고 받은 거예요."

조혈모 세포 기증을 신청한 것은 7년 전 본과 학생 때였다.
헌혈을 하러 갔다가 우연히 관련 자료를 보고 기증 등록을 했고, 처음 몇 달 간은 당장이라도 적합자가 나왔다는 연락이 올 것만 같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적합자는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고 본과 공부는 바빴기에 언젠가부터는 조혈모 세포 기증 등록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2015년 9월 9일,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당시 나는 혈액내과 폴리클 실습을 돌면서 실제 환자들을 대하는 것에 전력을 다 하고 있었고, 모처럼 맞은 휴일에 온 출처 모를 전화가 반갑지 않았다.
이번 전화도 스팸이겠거니 하고 무시할 법도 했는데 왠지 중요한 전화일 것만 같은 느낌에 전화를 받았다. 조혈모세포 적합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이후의 3개월은 바쁘게 지나갔다. 실습을 도는 틈틈이 검사를 받고 코디네이터 선생님과 연락을 주고 받으며 기증 날짜를 잡았다.
 
원칙상 환자 정보는 비공개로 유지되기 때문에 코디네이터 선생님을 졸라서 얻어 낸 정보라곤 수여자가 6세 여아고 만성 골수성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어린 환자를 위해 음식도 가려 먹고 운동도 하면서 컨디션 유지에 집중했다.

2015년 크리스마스 이브, 연말 분위기가 한창이었지만 나는 기증을 앞두고 조혈모 촉진제 주사를 맞으러 병원으로 향했다.
백혈구가 늘어나면서 몸살 기운처럼 몸이 욱신거리고 두통과 구역감이 심해져 그 해 크리스마스 휴일은 내내 누워서 보내야 했다.
환자도 기존 면역체계를 없애는 전처치를 받는다고 했는데, 조그만 환자는 무균실에서 혼자 얼마나 더 무섭고 힘들까.
 
이 전처치 기간에 기증자가 기증 의사를 철회할 경우 환자는 기존 면역체계가 없는 상태에서 새 조혈모세포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그렇게 환자가 사망한 사례가 있다면서 코디네이터 선생님이 기증을 확실히 할 것인지 몇 번이나 확인하는 모습을 보며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몇 달을 기다리며 준비한 조혈모세포 기증은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처음 가 본 VIP 입원실을 신기해하며 채혈 시간이 되면 팔을 내밀고 밥 시간이 되면 진수성찬을 먹고, 헌혈 때보다 조금 더 크고 시끄러운 기계 옆에서 한 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더니 다 끝났다고 했다.
나한테는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생성되는 이 세포가 환아의 아픈 몸에서 열심히 일해서 건강하게 해 주길 가만히 기도하며 기증 절차를 마무리했다.
얼마 뒤 코디네이터 선생님에게 연락이 와서 환자에게 조혈모세포가 생착이 잘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한동안은 주위 사람들에게 기증 후기를 전파하고, 감사패와 감사 뱃지를 받고 뿌듯해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언제 기증을 했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조혈모세포 기증을 통해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드라마틱한 일은 영화에서나 있는 거였고, 나는 그동안 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인턴을 거쳐 어느새 전공의 3년차가 되었지만
여전히 실수를 하고 감정에 휘둘리는 평범한 젊은 의사다.

바쁜 병원 생활속에서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질 때, 환자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지치고 힘들 때, 이 어려운 과정을 잘 마칠 수 있을지 불안해질 때마다 가운에 달린 뱃지를 가만히 만져본다.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내 일부를 기증했던 결심에 비하면, 또 그 친구가 고생했을 것에 비하면 지금 내 앞에 놓인 일은 충분히 해 볼 만 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내 작은 기증으로 지금은 병원 침대를 벗어나 건강하게 뛰놀고 있을 소녀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루 하루 성실하게,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고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 도우면서 살아가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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