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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 60년간 가장 소중한 약속 지켜왔다
2022-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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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

60년간 가장 소중한 약속 지켜왔다

고려대의료원에 10억원을 쾌척한 윤주홍 원장이 기부와 동기를 밝히고 있다.
 

"있으면 주고, 없으면 나누라. 없는 가운데 나눔이 신체를 떼어내는 고통일지라도 행하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며 살아오며 '봉천동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윤주홍 원장(윤주홍의원)이 평소 말하는 지론이다. 그는 60년 전 하나님과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약속했으며 지금도 그 약속을 한결같이 지켜가고 있다.

윤 원장은 이번에는 고려대의료원에 의학발전기금으로 쓰라며 10억 원을 기부했다. 고려대의료원은 윤 원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의과대학 418호실을 '윤주홍 강의실'로 명명했다. 평생 나누고 퍼주는 데 익숙한 윤 원장은 이렇게 자신의 이름이 걸린 강의실을 보니 어색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이건 내가 아니라 '그분의 뜻'이에요. 그러니 여러분은 그것만 꼭 기억해 줘요. 그러면 돼요."

 

 

의학 발전 기금 10억 쾌척

허약한 몸으로 국문과에 다니던 윤 원장은 1962년 "지금까지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했다. 편입 시험날 그는 생물학 답안지에 정답 대신 '노폐물로 가득한 정맥 같은 삶을 버리고 의사가 되어 동맥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적었고, 다음 해 의대생의 삶을 시작한다. 고행 같은 수업을 무사히 마친 그는 1968년 졸업과 함께 의사가 된다.

의대를 마친 윤 원장은 경찰병원 수련의로 들어가자 봉사의 삶에 뛰어들었다. 그는 서해안에 낙안도, 외도, 간월도, 내파수도, 장고도, 고대도 등 진료시설이 없어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섬이라면 어디든 갔다. 섬을 돌면서 윤 원장은 별의별 환자를 다 만났다. 골절, 화상은 기본이고 맹장 수술에 아이까지 직접 받기도 했다. 윤 원장은 경찰병원 수련을 마치고도 무의도와의 인연을 40년 동안 이어갔다.

1972년 윤주홍 원장이 신림보건소를 가다가 그만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차에서 내려 보니 길옆에 집 짓는 판자가 있는데 그 아래로 사람의 발이 보였다. 시체인 줄 알고 가서 보니 자는 사람의 발이었다. 한 식구가 자고 있는데 키가 큰 큰아들 발이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그길로 윤 원장은 봉천동에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무의도 진료와 '봉천동 슈바이처'의 탄생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윤주홍 원장
 
판자촌 사이에 세워진 병원, 무슨 그리 아프고 다칠 일이 많은지 윤주홍 의원은 늘 문전성시였다. 하지만 그들에게 치료비를 모두 받을 순 없었다. 윤 원장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면 주는 대로 받으며 치료했다. 윤 원장은 판자촌을 오가며 밤중에도 가난한 환자를 돌보기 위해 왕진을 다녔다. 그런데 어느 밤중에 칼 든 노상강도 2명을 만났다. 목에 차디찬 칼이 들어오니 무조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이고 가방이고 모두 내놓았다. 

그런데 가방을 뒤지던 한 강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강도에게 다급히 말했다. "야, 이 사람 윤주홍이야 윤주홍. 여기 아래 윤주홍 의원 있잖아. 며칠 전에 우리 아들도 치료해 줬단 말이야." 둘은 잠시 눈빛을 교환하더니 윤 원장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이에 앞서 윤 원장은 고열이 난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왕진을 갔다. 그때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사내가 있었는데, 윤 원장은 개의치 않고 아이를 치료해 줬다. 그런데 그 강도가 그 아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이런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에는 한 아이와 어머니가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 여성은 당시 한국일보에서 근무하던 기자의 아내였다. 그 기자는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고, 한국일보 '표주박'이라는 코너에 '봉천동 슈바이처'로 윤 원장을 소개했다. 그렇게 '봉천동 슈바이처'가 탄생한 것이다.

윤주홍 원장은 봉천동에서 빈민들을 위한 진료를 이어가면서 보육원을 돌면서 아이들을 치료하기 시작한다. 당시 윤 원장에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만 해도 2000여 명이 넘는다. 또 윤 원장은 1994년 관악장학회를 설립해 돈이 없어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는 학생들을 돕기 시작했다. 무의촌 진료를 포함한 수많은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윤주홍 원장은 제1회 서울시민대상과 국민훈장 동백상 등을 수상하게 된다.

"남의 집에 손님으로 가거든 뭐든 다 먹지 말고 항상 3분의 1은 남겨야 한다. 수확 철이 되면 벼나 보리는 다 베지 말거라. 그리고 이삭을 줍는 사람이 있으면 절대로 내쫓아서는 안 된다." 어린 시절 윤주홍 원장의 할머니는 언제나 몸소 나눔을 실천했다. 할머님은 내가 가진 것 중에 3분의 1은 다른 이를 돕는 데 써야 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가르침을 윤 원장은 지금까지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다.

"사실 그렇게 나누고 봉사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죠. 없는 사람에게는 삼분지 일도 힘든 법이에요. 그래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1할 중 2푼은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는 거예요. 힘들 때 나누는 건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는 고통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요.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법이거든요."

평생을 나눔과 봉사의 삶을 살아온 윤 원장, 그는 2푼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내놓고도 혹시나 내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윤 원장. 60년 전 '남을 위해 살겠다'라고 '봉천동 슈바이처' 윤주홍 원장이 했던 그분과의 약속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